종교와 진리에 대한 생각(제목이 너무 딱딱해-_-)


3~4년전에 한 인도태생의 종교적 리더(한때는 그를 위해 신지학회라는 모임?조직에서 준비한 종교 교주에 앉혀졌지만 스스로 해체선언을 하며 해체했기에 그냥..뭐라고 불러야돼?;) . 20세기 3대 성인중 하나라고도 불렸던 사람의 카페에서 활동했던적이 있었다.그 사람의 이름은 지두 크리슈나무트리(Jidu Krishinamuti)이다(이하 K로 하겠음). 결국엔 운영자까지 올라갔고, 카페 주인은 여러권의 그분의 책들 번역해서 내셨고. 직접 사인까지 해서 선물로 책을 받았던 사이기도 하다. 사진 처럼 원서까지(사진의 원서의 서문을 그 유명한 <멋진 신세계> 라는 소설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쓰기도했다)  몇권 구입했을 정도다. 번역된것은 물론이고...번역만 되고 출판은 안된것들까지.

대략적인 설명을 하자면 인도 태생답게 깨닮음을 얻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고 그의 사상은 불교, 그중에서도 권위나 경전 이론 등에 대한 의지를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성찰을 말하는 '선불교' 와 많이 닮아있다. 그는 3대 성인이라고 불렸던것 만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철학자나 종교학자부터 시작해서 정말 물리학자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들과 이런저런 많은 대화를 나누고 대부분이 기록되어 책으로 남아있다. 어떤 대화에서는 불교 철학자와 선불교 철학자들이, K의 사상이 얼마나 부처의 말씀을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혹은 어떤 부분에서는 더 독창적으로 표현했는지 유사성을 말하면서 대화를 부분도 있다. 쨌든 설명은 이정도로 하고.

몇년만에 MSN으로 만나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지. 어떻게 사는지, 왜 오랜만에 나타났는지, 건강은 어떤지. 그분은 한때 친구와 같이 K에 대한 사상을 나눴던 내가 왜 이따구가 돼었는지 궁금하시더라.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허우적 대면서 진화생물(사회생물학?)을 말하고 뇌과학을 말하고("불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지 말라는게 이성간의 사랑하는 것안에 들어있는 온갖 집착과 자아중심적인 생각과 그것이 낳는 잘못된 고통에 대한 비판인데 혹은 인식론적인 비판으로) '종교적 진리' 가 아닌 그런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말해주는 여러 문제점등. 

나도 궁금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본결과 무엇보다 '종교학' 이라는 태어난지 100년남짓한 새로운 학문을(그러니까 신학이라던가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나 교리에 대해서 옳고 그럼 따위를 따지는 오래된 학문이 아니라) 만났던게 제일 컸던것 같다. 아래 긴글쓰기로 올려놓은 대화의 정진홍 역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가 엘리아데의 종교학을 만나서, 종교들이 자기 신념안에 갇혀서 스스로 자폐적으로 자신들에 대해서 말하는게 아니라. 종교를 서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전혀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예를들어 애인과 삶의 문제가 너무 복잡하여, 나름 대로 가장 친숙한 종교인 불교에 대한 책을 4~5권을 몰아서 읽었적이 있었다. 유명한 경전에 대한 해석, 불교에 대한 사회비판, 깨달았던 중국의 선사들의 깨닮은 계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책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해답이 안되더라. 내가 그들이 제시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소위말해서 깨닫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좀 다른 방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밑에 등록된 대담처럼, "종교를 문제에 대한 해답" 으로 이해한다. 나한테 종교를 권했던 모든 사람은 종교를 그렇게 경험했다고 고백하며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에게 종교를 권했고, 종교 문화가 갖는 모습을 보면 삶의 사사로운 문제부터 세계관까지 인간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종교문화는 기능했다는걸 알 수 있다.

문제는, '해답' 은 질문이 없으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드라마를 소개하면서 그중 인물이 '모든 해답을 다 아는' 천재라는 말을 하면서 소개를 했는데, 질문 없는 해답은 없다. 질문을 만들어내는 동기나 구조없이 절대적이고, 그야말로 모든것을 초월한 신에게서 떨어진 진리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질문이 생길 상황 조차 존재하지 않고 어떻게 앞으로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데 모든답을 알고 있어? 그냥 단순히 단순한 하나의 세계관, 체계에 껴맞춰서 그 안에서 자폐적으로 해답을 소유했다고 믿는거지.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에 적힌 신의 말씀이 신에게서 전해진 것이라고 믿고 싶은가?? 그렇지만 종교를 역사나 문화적으로 이해해보면, 그 어떤 믿음과 사상도 그냥 생긴게 아니라 그 나름의 역사, 문화, 그런식으로 물음을 묻고 해답을 얻게된 구조가 있다. 이른바 '나를 넘어서는 신' 을 체험한 사람들, 신들림을 겪은 사람들 엮시 그 신은 언제나 역사적이고 문화적이고, 어떤 조권화된 신이었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는 종교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쨌든 모든 해답이란 결국 문제라는 정황에서 나온 것인데, 그렇게 경험한 해답은 그 문제 정황에 놓여있는 사람이나 문화에게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해답으로기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게 견딜 수 없다. 해답을 찾게 하고 해답을 낳았던, 혹은 더 종교적으로 말해서 '구원을 받게 했던' 인간이나 문화의 역사, 문화적인 문제 정황이 변했는데도 종교는 굳어버린채로, 이제는 근거도 공감도 할 수 없다고 누구나가 다 주장하는 말들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수천년된 종교가, 수천년 동안 인간의 삶에 해답을 경험하게 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결정했더 종교가 인류역사에서 사라지기도 했던 것은 바로 진리의 이런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어리고 고통속에 살고 있는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문제가 중요하다" ,"문제가 놓여있는 정황"이 해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누군가가 제시하는 해답(그게 세련되고 맘에 들면 또 몰라-_- 초 유치하고 보통 수천년이나 더오랜기간 문화에서 만들어진 관념이 고스란히남아있는 전혀 온갖 편견과 비과학적인 세계)이나, 세계관을 덜컥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종교를 통해서 해답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기쁨에 그 모든 문제로부터의 놓여짐에, 모든 문제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기쁨에 타인에게 종교를 권하기도 하고. 그런 신념의 정도가 강한 사람은(흔이 이런 사람을 사이비다 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보통 신도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본질적으로 차이가 무엇인가?), 뭐 지하철에서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는 피켓을 들고 외친다거나 아무런 과학적 근거나 현상에 대한 이해도 없이 단지 자신을 구원했던, 자신에게 해답을 경험하게 했던 종교의 경전에 쓰여있단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고, 이상한 윤리를 만들어내고 심하면 전쟁까지 불사하는 짓을 한다.

그래서 난 종교인이 되는걸 견딜 수 없다. 이미 제도화된 종교를 말이다. 내가 만약 종교인이 된다면, 그건 신도가 나 하나뿐인 종교의 교주가 되는 일 뿐이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믿거나 귀의한다는 것의 성격이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식이어야겠지

나는 내가 동의하고 좋아하는 불교 조차 그렇게 생각한다. 불교는 특정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질문이 낳은 하나의 해답이고 구원일 뿐이다. 절대적인 무엇일 수 없다. 해답이란 언제나 물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등의 특정한 문제 정황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해답조차 그런 배경에 의해서 태어났기에 똑같이 역사적이고 문화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위에서 말했지만, 이런것과 생각을 종교학을 통해서 배웠다. 정진홍이라는 종교학자 빠돌이 수준이다. 그의 책의 대부분을 읽었고 몇권을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책들도 다 사서 다 소장할 생각이다. 하악 지름신...-_-



정진홍:.....예를 들면 종교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그렇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절대적인 진리로 수용하죠. 그런데 바로 그러한 해답은 특정한 시대나 문화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반향(反響)입니다. 따라서 비록 그 해답이 ‘인간’에게 본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온갖 시대나 문화의 물음에 기계적으로 상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종교는 그러한 문화-역사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의 해답의 절대성을 보편성의 범주로 상정하고 모든 정황에 규범적인 것으로 강요하곤 하지요. 결과적으로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는 ‘경화(硬化)된 해답의 구조’로 기능합니다. 게다가 제도화된 종교의 경우, 이 해답은 ‘힘’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물음도 해답도 특정한 종교의 제도적 전통과 실천적 규범에 의하여 통제되고 강요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죠. 이러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마치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비극적인 정황을 낳습니다.

장석만: 아까 말씀하신 경화된 해답의 구조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라면,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경화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정진홍: 진리는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이 삶다움을 찾아 마침내 도달했다고 여기는 종국적인 상황에 대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히 하나 둘 하는 수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진리를 절대나 불변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진리이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를 굳이 ‘사물화’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시공적인 것이라서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 안에서 상황적인 적합성을 가지고 인간의 간절한 희구에 답변해주는 것이라서 오히려 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경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고, 그 적응력을 통해 현실을 재창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산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적인 적합성을 잃은 진리는 이미 진리라고 할 수 없지요. 때로 우리는 너무 관행적으로 기존의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과오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담의 전문 링크 -> http://blog.naver.com/bky1059/20008943130

 

▲ 정진홍(鄭鎭弘·67) 한림대 특임 교수는 한국 종교학 연구의 1세대 학자로 평가된다. 서울대 종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정 교수는 1960년대 말 미국 연합신학대 유학 중 종교학자 엘리아데를 직접 대면하고 그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본격적인 종교학자의 길을 걸었다.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직하며 종교를 신앙의 대상에서 문화적 차원의 담론 대상으로 이끌어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으며 시집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 등도 펴냈다.

by 라피르 | 2008/10/28 13:50 | 경험과 기억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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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 at 2008/11/13 02:55
신선한 견해이군요~오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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